핵심인재의 이력서에는 무엇이 있을까

Posted by 야근반장
2009. 4. 7. 12:42 information/등용문
 
Part 1 Talk 핵심인재 6인과의 대담 -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성공한다는 것
 
열정이 없다면 꿈꾸지도 마라
 
언젠가 다니는 직장에 사직서를 던지고 개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샐러리맨은 임원까지 오르겠다는 꿈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다지고 있을 것이다. 수십 년 일한 직장에서 마지막 순간을 ‘기업의 별'이라 불리는 임원으로 장식했으면 하는 바람을 샐러리맨이라면 누구나 가져보았을 것이다. 많은 샐러리맨들이 이를 악물고 '기업의 별’이 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퇴직 시기를 연장하거나 억대 연봉을 탐내서가 아니다. 기사가 딸린 승용차나 사회적 혜택을 누리고 싶은 마음은 더욱 아닐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실력자가 되고 싶은 승부욕이며, 하나의 사업 부문을 통째로 주도하며 좀더 넓은 영역에서 꿈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다. 오랜 시간 애정을 쏟은 직장이나 해당 업계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고 더 나아가 세상에 작으나마 보탬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신문이나 방송에 얼굴을 내밀며 성공한 인물로 소개되는 이들이 가진 남다른 능력은 무엇일까. 그들은 자신의 일을 항상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100퍼센트 만족했을까.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출발해 임원의 자리에까지 오르고, 사내뿐 아니라 업계에서도 슈퍼스타라 불릴 정도로 눈부신 성공을 거둔 이들의 경험에서 중요한 핵심만 찾아내 그들과의 교집합을 넓힐 수 있다면 꿈을 향해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이 조금은 빨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핵심인재 6인과의 대담
 
이들 6명의 핵심인재는 금융, 정보통신, 제약, 게임, 조리업계의 신화창조자들이다. 이들이 들려주는 일과 성공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는 성공을 꿈꾸는 샐러리맨들에게 꼭 필요한 양식이 되리라 믿는다. 
 
필자 : 첫 번째 질문으로, 다소 엉뚱한 질문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스스로도 성공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조의주 : 성공했다기보다는 남들보다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은 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재미와 만족을 느끼고 있고요.
 
추연성 : 저 역시 성공했다기보다 지금까지는 재미있게, 행복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고, 어려운 일을 겪기도 했지만 크게 흔들리거나 꺾이지는 않았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어요. 다만 성공이란 것이 현 시점에서 완결형으로 평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민상(C사 신입사원, 지방 K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하고, 성공이나 처세에 관한 책들도 넘쳐나는데 정작 무엇을 성공이라고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두시나요?
 
조의주 : 성공이 대단히 거창한 것은 아닐 거예요. 본인이 하는 일에서 다른 누구보다 앞선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성공이 아닐까요. 본인이 만족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것 말이에요. 성공이라는 것이 완결형이 아닌 진행형이라 함은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그 경지를 지켜나가야 하기 때문이에요. 한 번 성공했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현재 최고의 실력자라고 하더라도 늘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지면 안 되고, 계속해서 자신을 갈고 닦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하죠. 
 
필자 : 모두들 너무 겸손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충분히 성공하셨고, 또 이미 핵심인재들이신데 말이죠. 그렇다면 이번에는 질문을 좀 바꿔볼게요. 여러분들께서 일하시는 분야를 가만히 보면 하나같이 요즘 ‘뜨는’ 분야입니다. 이동통신이나 게임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약개발, 보험계리사, 금융, 웰빙시대에 맞춰 조리업까지 모두 잘 나가는 분야에서 일하고 계신데, 진로를 결정하실 당시부터 이 일이 뜰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나요?
 
정영석 : 글쎄요, 그런 분이 있나요? 저는 아니에요. 아시겠지만 게임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입니다. 1994년 그래픽 디자인으로 게임과 인연을 맺었는데 당시만 해도 게임산업은 굉장히 열악했어요. 게임업체의 규모도 작았고, 직원은 물론이고 사장도 배고프긴 마찬가지였어요. 게임 시장이 얼마나 커질지, 게임개발자의 연봉이 어디까지 오를지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습니다. 
 
최민상 : 좀 뜻밖입니다. 현재 이 정도의 성공을 이룬 분들이라면 이미 10년, 20년 전부터 남다른 백년대계를 세웠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조의주 :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되 계획 없이 무작정 할 수는 없죠. 계획도 분명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10년 이상 너무 멀리 내다보고 가는 것보다는 3년이나 5년 이내로 기간을 좁혀서 아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일 거라 생각합니다. 
 
최민상 : 그렇다면 진로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추연성 : 어떤 분야에서 남다른 성과를 내려면 자신이 좋아하고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 실력까지 갖춘다면 최선이겠죠. 하지만 두 가지를 다 못 가졌다면 우선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편이 앞으로의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출발할 때는 실력자와 차이가 나겠지만 일에 대한 열의가 있으면 그 차이는 금방 좁혀질 겁니다.
 
이성규 : 어떤 일이든 목적의식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공부를 할 때도 공부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큽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봐도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결과물은 분명히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자 : 제가 평소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가 과연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사람들도 위기의식을 느낄까 하는 점이었어요. 어떠세요?
 
정영도 : 문득 드는 정도가 아니라 많이 느끼죠. 사실 임원이 되고 나서 위기의식이 더 커졌어요. 그만큼 책임도 많아졌고 경영진이 기대하는 수준도 높아졌으니까요. 문제가 생기면 직접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늘 긴장감을 갖고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필자 : 어려운 순간들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일이 너무 힘들면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잖아요.
 
이주식 : 일을 하면서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기만 하면 어떻게 계속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려운 일들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지만 해결책을 찾아내고 일을 풀어가다 보면 힘이 생기고 기분도 좋아지고 그렇죠. 인생이란 게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적어도 단순반복적인 일이 아니라 특정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일을 하고자 한다면요. 그런 점에서 이 일이 제게는 천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일이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낙담하거나 신세를 한탄할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찾아야죠. 
 
필자 : 마지막으로 사회에 첫발을 막 내딛은 최민상 씨를 위해 회사에서 인정받는 법이랄까, 사랑받는 후배가 되는 방법을 좀 알려주시죠.
 
이주식 : 함께 일하고 싶은 후배들의 유형을 말하자면 두 가지가 있어요. 일에 열정을 가진 후배들이 첫 번째입니다. 정말 자신의 혼을 불어넣어 일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다른 한 부류는 영리한 친구들입니다.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친구들이죠. 두 친구들이 모여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며 상승작용을 하면 높은 성과를 낼 수가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항상 먼저 남에게 베풀려고 하고, 좋은 관계를 갖도록 하는 자세도 중요해요. 어떤 조직에서든 독불장군은 오래갈 수 없거든요. 혼자 아무리 뛰어나도 조직 속에 융화하지 못하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힘들어요. 
 
필자 : 최민상 씨, 오늘 모임 어땠어요? 도움이 많이 되었나요?
 
최민상 : 네, 분야는 각기 다르지만 성공한 분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된 키워드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련 앞에 굴하지 않는다거나 한 번의 성공으로 자만하지 않는다는 점도 그 중 한 가지인 것 같아요. 또 직장에서 윗분들이 후배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아요. 지금까지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선천적인 자질이나 남다른 배경이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과 저 자신을 이질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 벽이 많이 허물어진 것 같습니다. 어디선가 “성공하려면 성공한 사람을 만나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의 의미도 이제는 알 것 같아요. 또 우리는 늘 지향해야 할 목표점을 설정해두고 그것을 통해 동기를 부여받는데, 이렇게 성공한 분들과 함께 한 자리가 제게는 그런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정말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Part 2 Story 핵심인재 6인의 이력서 - 현재의 자리에서 최고가 된다는 것
 
끈질긴 성실함은 태산도 옮긴다.
 
“고졸 조리사에서 요리 명장으로 - 정영도 프레지던트호텔 이사”
 
음식 문화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시도들 : 대생기업에서 경력자 공채를 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더 생각하지도 않고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동양 최고의 빌딩에서 일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여기서 승부를 걸겠다는 다짐도 있었다. 신설 기업이 경력 직원들에게 제시한 파격적인 대우도 입맛을 당겼다. 입사 후 포부를 묻는 면접관에게 조리사 출신의 임원이 되겠다고 힘주어 대답했다. 1급 조리사로 입사가 결정되었을 때에는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요리사가 되겠다고, 일에 한번 미쳐보자고 각오를 다졌다. 프랑스어와 일본어를 공부한 것도 이때였다. 대생기업이 호텔신라와 기술제휴를 맺은 후 레스토랑 경영과 조리사 교육을 호텔신라 측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부분 영어로 된 책을 보고 양식 조리법을 익혔던 당시 호텔신라가 프랑스어로 된 조리법 교재를 던져주는 것이 아닌가. 새벽잠을 줄여 프랑스어 학원에서 기초를 다지고 퇴근 후에는 집에서 복습하며 요리책을 읽어나갔다. 제대로 된 요리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언어는 필수였다. 일본어는 개인 강사까지 찾아가며 배우는 열의를 쏟았다. 평소 구멍이 난 양말도 꿰매 신을 정도로 검소한 그였지만 실력향상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분에는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990년 일본 오호쿠라호텔 연수를 시작으로 약 10년 동안은 해외시장 조사로 분주했다. 1993년 미국을 시작으로 이듬해 일본, 1996년 싱가포르와 1998년 호주까지 해외시장을 두루 섭렵하며 각국의 입맛과 음식 문화의 특색을 몸소 체험했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자체 개발한 양갈비 요리를 선보인 정영도 이사는 청와대에서 먹었던 음식보다 더 훌륭한 맛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김치나 스테이크와 같은 대중적인 메뉴에 인삼을 곁들여 상품을 고급화하는 시도도 했다. 정영도 이사는 동물과 식물, 해산물과 주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품 재료의 성분과 저장방법 및 특성을 분석했다. 여기에 응용할 수 있는 요리를 따로 정리했고, 3년가량 집중적으로 연구한 자료를 토대로『식품조리재료학』을 집필했다. 책은 사내에서는 물론이고 일부 대학교에서 교재로 채택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요리 명장에 이름을 올리다 :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정영도 이사는 회사 설립 이래 두 가지의 기록을 세웠다. 외부에서 부장급으로 스카우트된 것도 그가 처음이고, 조리사 출신으로 임원이 된 것도 그가 처음이다. 첫 번째 ‘처음’은 억척스러움으로 얻어낸 결과였고, 두 번째 ‘처음’은 불모지를 옥토로 가꾸어내고 얻은 과실이었다. 정영도 이사는 노동부 산하 산업인력공단에서 선정하는 대한민국산업명장 가운데 요리 부문 명장에 이름을 올렸다. 네 번의 도전 끝에 거머쥔 성과였다.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요리사 가운데 사회봉사 활동, 독창적인 요리개발 성과, 조리법이나 식자재에 대한 지식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선발하는 명장은 그가 요리사 가운을 입은 이후 계속 꿈꾸어온 것이기도 했다. 프랑스 대사관에서 주관하는 프랑스조리사중앙회의 회원에도 등록했다. 회원 자격이 까다로워 프랑스 요리에 일가견이 있고 음식 문화 발전에 기여한 바 있는 요리사에게만 특별히 부여한다. 
 
기업의 임원이 된다는 것 : 입사 4년 만에 호텔 설립 이래 조리사 출신 임원 1호가 되었고, 요리 명장의 반열에도 올랐다. 그는 임원이 된 이후로 오히려 더 큰 위기의식과 책임감을 느낀다. 임원이 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서 실력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자신을 상품화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의 임원이 매체에 소개되면 자연스럽게 기업을 홍보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마지막으로 인내력이 필요하다. 실력을 갖추고 보니 타이틀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앞만 보고 달린 세월이 어느새 35년. 정상에 서고 보니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만큼 이룬 것도 세상의 덕을 본 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나누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진정한 최고는 삶의 내공이 결정한다. 
 
“국가 경제 해결사, 미스터 구조조정 - 이성규 국민은행 부행장”
 
국가 경제의 성패를 두 손에 : 1998년 3월 하순, 어느 날 걸려 온 한 통의 전화가 모든 계획을 일시에 정지시켰다. 1년 정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생각으로 필요한 수속을 모두 마치고 비자도 받아놓은 상황이었다.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이었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은 대기업의 연쇄부도가 금융공항으로 이어져 국가 경제가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사태를 막아내기 위한 중차대한 일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이헌재 씨가 발탁한 용병은 이성규 부행장이었다. 그는 기업구조조정위원회의 사무국장으로 기업 워크아웃 작업에 본격 착수하게 되었다. 고합 계열 4개사를 필두로 94개 기업의 35조 원의 여신과 대우 계열 12개사의 65조 원의 여신을 합쳐 총 100조 원에 달하는 부실채권이 이성규 부행장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의 나이 불과 30대 후반이었다. 
 
매순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 : 이성규 부행장은 기업 워크아웃의 기초적인 매뉴얼을 작성했다. 워크아웃의 매뉴얼은 금융관행과 금융상품의 구조는 물론 채권자 구조와 법적인 권리, 책임문제까지 집대성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정부나 이해당사자의 부당한 요구나 고집에 흔들리지 않고 곧게 중심을 세우는 의연함으로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당시 한 해 국가 예산과 맞먹는 기업 부실을 정리한 일은 세계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워크아웃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새겨진 ‘구조조정 전문가’, ‘부실 해결사’라는 코드는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를 호출했다. 2004년 다중채무자를 구제하기 위한 배드뱅크가 출범했을 때도 그 뒤에는 어김없이 부실 해결사가 함께 했다. 신용불량자가 여러 금융기관에 채무를 가지고 있을 때 채무조정의 창구를 단일화하기 위해 자산관리공사와 협상을 벌였다. 기업에 이어 개인까지 부실을 털어내게 한 툴은 그가 남긴 사회적 유산이다. 
 
이성규 부행장에게 직장이란 아침에 출근해 퇴근하는 시간까지 조직이 원하는 만큼만,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해주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한국신용평가에서 발간하는 전문지의 편집을 맡았을 때는 맞춤법과 띄어쓰기만 손질한 것이 아니라, 기업분석 업무를 하면서 해당 기업의 가치를 산출하는 것은 물론 해당 산업의 본질도 함께 꿰뚫어보았다. 제일제당과 음반회사인 한국 EMI에서 일할 때는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산업의 가치를 움직이는 세력의 판도를 읽어냈다. 그러면서 콘텐츠 사업의 잠재력에 눈을 떴다. 매순간 주어진 일 속에서 무엇이든 배우고 익히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쌓은 것들이 언젠가는 쓸모가 있으리라 여기며 그 깊이와 폭을 키워나갔다. 
 
몸담은 조직에 가치있는 자산을 남겨라 : 2002년 세계경제포럼WEF이 그를 ‘아시아 차세대 리더’로 선정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2002년 1월 국민은행에 들어가 첫발을 들여놓은 곳은 남아 있던 부실채권을 정리하는 워크아웃 본부였다. 기업 구조조정 끝물이었던 국민은행의 대기업 부실채권을 대략 정리하는 데는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업무가 확대된 영업지원 본부를 맡으면서 소위 후선업무를 정비했다. 이어 모바일뱅킹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켜나간 것은 은행 경영에 있어서 발상의 전환이었고 새로운 트렌드를 읽어내는 해안이었다. 그가 정비한 업무 시스템은 국내외 은행들이 벤치마킹하는 모델이 될 만큼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는 가진 것을 나누면서 스스로의 힘을 배가한다. 몸담은 조직에, 함께 일하는 후배들에게 유·무형의 가치있는 자산을 많이 남길수록 성공적인 삶이라 믿기 때문이다. 습득한 지식을 혼자 독점하면 남보다 더 앞서고 지위도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발상이다. 선순환적인 자기발전으로 느끼는 지적 희열은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한다. 좋은 조직과 경영자는 각자의 장점을 이끌어내야 하고 잠재력을 발굴해 기업과 개인이 윈윈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프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즐긴다.
 
“서른여섯의 게임업계 신화 - 정영석 넥슨 개발실장”
 
실패가 때로는 약이 된다 : 1989년 전자통신공학과에 입학 후 2년 동안 남들처럼 평범한 대학시절을 보내고, 대부분 그렇듯 3학년이 되기 전 군에 입대했다. 무언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였다. 태어나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었다. 한 학기 성적만 가지고 섣부르게 한 판단일 수도 있었지만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좌절과 고민을 반복하며 방황하고 있던 어느 날 한 PC 동호회의 구인광고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함께 게임을 만들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였다. 그림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고 컴퓨터 그래픽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었다. 동경했던 일을 취미가 아니라 직업으로 선택할 수 있는 그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하며 1년을 바쳐 만든 게임은 기대했던 만큼의 결과를 안겨주지 못했다. 첫 작품에서 실패를 맛보았지만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넥슨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6년의 일이다. 게임 ‘어둠의 전설’ 개발을 준비하던 넥슨이 그래픽 디자이너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도전장을 냈다. 대학 졸업장이 없었지만 입사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당시만 해도 1년 동안 실무 경험을 쌓고 작품을 직접 만들어본 그래픽 디자이너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입사한 뒤의 3년 간은 디렉터로 도약하기 위한 포석을 두는 시간이었다. 그림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차츰 욕심이 커졌다. 이런 그림이, 이런 캐릭터가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프로그램의 기술적인 문제와 사운드까지, 미처 전문지식을 갖추지 못했던 분야는 담당자를 찾아 배워가며 일을 진행했다. 발로 뛰는 만큼 시야가 넓어졌고 게임을 구성하는 전체 판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국민 게임이 된 카트라이더의 열풍 : 전혀 뜻하지 않았던 대박이었다. 2004년 8월 상용화에 나서고 6개월만에 회원 수 1천만 명을 돌파, 국민 4명 중 1명이 즐기는 ‘국민 게임’이라는 간판을 얻었다. ‘카트라이더’는 10년 가까운 세월의 실패와 성공에서 배운 감각과 기술이 농축된 결정체다. 레이싱은 너무나 흔한 소재였지만 동시에 개척할 여지가 무한한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다음은 타깃 유저를 정하는 일이었다. 게임을 기획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대상을 전문 게이머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초등학생부터 학부모까지 이용자 폭을 넓힌 ‘국민 게임’은 중독되지 않는 게임, 쉬운 게임을 만들겠다는 그의 고집과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힘을 집중하는 노력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1천만 회원은 이용자 저변을 넓힐 수 있는 세심한 배려로 만들어낸 신화였다. 게임 포털도 아닌 단일 게임이 이와 같은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데는 그만한 숨은 노력이 있었다. 
 
성공하려면 좋아하는 일을 하라 : 현실적인 목표를 버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자고 게임을 선택했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흔들릴 때가 있었다. 1990년대에 장차 각광받을 것이라던 전자공학과를 나와 대기업에 취직한 대학친구들은 입사 첫 해부터 훨씬 높은 연봉을 받으며 대리로 과장으로 승진했다. 반면 그는 넥슨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게임산업이 어디까지 성장할 것인지, 게임 시장의 파이가 얼마나 커질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게임업계에서 일하면서 친구들과의 격차를 좁히는 것은 결코 꿈꿀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위안이었다. 이제 한국의 게임산업은 수출을 할 정도로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고,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부분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이쯤에서 생각해보니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능력도 인정받고 명예도 얻었다. 이 정도면 그는 행복한 사람 아니겠는가. 
 
신념을 실천하는 열정을 지녀라.
 
“세계 최초 CDMA 상용화의 주역 - 이주식 SK텔레콤 상무”
 
CDMA 상용화를 향한 몸부림 : 무선 이동통신에 대한 지식은 박사 과정 때 한 학기 동안 관련 강의를 들은 것이 전부였지만 그는 향후 발전 가능성을 엿보았다. 1992년 한국이동통신에 입사하고 파견 근무처를 KT로 택한 것도 그래서였다. 내심 기대를 걸고 내린 결정이었지만 KT의 사업개발단은 새로운 CDMA 기술에 대한 그의 열의를 채워주지 못했다. 손놓고 앉아 있으면 안 되겠다싶어 아날로그 통신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회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그래 12월 미국 퀄컴에 출장을 떠날 때만 해도 그저 CDMA가 무엇인지 맛만 보자는 생각이었다. 커다란 가능성을 발견한 곳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을 직감하게 된 곳이 미국의 조그만 벤처기업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요지는 아날로그 통신에 비해 CDMA의 용량이 10배 가량 높다는 것이었다. 
 
퀄컴이 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통신 기술을 발표한 것은 1989년이었다. 1950년대부터 군용이나 위성통신으로 쓰였던 대역확산 방식을 새로운 디지털 이동통신 서비스에 적용할 수 있다는 퀄컴의 발표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증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었지만 그래서 성공하기만 하면 그 가치는 천문학적인 수준이 될 터였다. 한국에서 아날로그 통신은 가입자 수가 200만~300만 명이면 주파수가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이미 유럽에서 검증된 바 있는 GSM 방식이 수용할 수 있는 가입자 용량은 아날로그의 세 배 가량이다. 제한된 주파수를 보유한 한국이동통신이 가야 할 곳은 더 많은 용량을 확보할 수 있는 CDMA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당시 KT가 CDMA 사업을 맡았던 것은 자금과 인력을 가졌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한 달에도 몇 번씩 보고서를 작성해 CDMA 프로젝트를 한국이동통신이 주도해야 하는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것은 목이 타들어 가는 아우성이었고 몸부림이었다. 
 
피를 말리는 고통, 그리고 영광 : 1993년 하반기부터 1994년까지 CDMA의 서비스 용량 입증과 삼성전자의 첫 CDMA 단말기 개발을 성공리에 마치고 1995년 중반부터는 구체적인 시스템 설계와 상용화 시험, 아날로그와 디지털 통신 연동 시험, 운용자 정합 기능 시험까지, 쏟아지는 과제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CDMA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지역과 아날로그 통신만 서비스되는 지역 간의 연동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상용화 예정일을 불과 10일 남겨놓았을 때였다. 퀄컴의 단말기로 통화 시험을 계속해왔는데 12월 20일 CDMA 단말기를 든 직원이 아날로그 지역으로 이동하자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 잡듯 문제를 파헤친 결과 미국과 한국의 아날로그 통신 서비스 방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퀄컴에 연락을 취했지만 문제가 발생했을 때가 하필 크리스마스 연휴기간이라 일을 할 수 있는 직원이 없었다. 이주식 상무의 잇따른 요청으로 퀄컴은 소프트웨어 제작에 착수했고, 어렵사리 소프트웨어를 받아 출시할 단말기에 모두 적용한 시점은 12월 30일이었다. 1996년 1월 3일 마침내 인천과 부천 지역의 CDMA 상용화를 마치기까지 지난 2년 6개월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타고난 일벌레, 타고난 리더 : CDMA 상용화는 500명이 넘는 연구원이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였다.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갖은 난관을 뛰어넘은 끝에 손에 쥔 영광이었다. 상용화의 순간까지 피를 말리는 고통이 따랐지만, 성공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집념이 만들어낸 신화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국가적인 사업을 주도하며 일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수 있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손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헌신적인 리더가 있었기에 또한 가능했다. 그는 사원부터 차장까지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대학 졸업자가 보통 10년을 밟아야 하는 과정을 뛰어넘어 첫 직급을 부장에서 시작했다. 아랫사람들로부터 화합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따라야 했다.
 
 
 
오르고 또 오르는 사람은 아름답다.
 
“보장성 보험 시장 개척의 선구자 - 조의주 푸르덴셜생명 상무”
 
종신보험 개발의 특명을 받다 : 국내 최초로 종신보험 상품을 개발해 ‘생명보험의 꽃’을 피운 주인공은 푸르덴셜생명의 조의주 상무였다. 벌써 십수 년 전인 1991년, 국내 생명보험 산업이 진정한 보장성 상품을 중심으로 성장하기 위한 전기가 이때 마련된 것이다. 라이나생명에서 푸르덴셜생명으로 스카우트된 조 상무가 처음 받은 특명은 종신보험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국내 보험계리사 자격증을 따고 이제 막 상품개발 업무에 눈을 뜨기 시작한 조 상무로서는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돌다리를 두드리는 마음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대 만들어낸 상품은 세상에 내놓자마자 처참하게 배척당했다. 꽃봉오리가 만개하기까지는 다시 몇 년에 걸친 진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장 급하지 않은 불확실한 사건보다 자녀의 입학이나 결혼과 같이 확실한 장래를 대비하기 위한 저축성 보험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장에 종신보험은 시기상조라는 지적이었다. 급기야 한국 지사를 철수하자는 목소리까지 불거져 나왔다.
 
멀리 내다보며 실력 다지기 : 그녀는 항상 삶을 길게 보고 계획을 세웠다. 여러 갈래의 방향을 놓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진로를 결정해야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는 고3 때 수학교사의 길을 택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녀는 교사로 일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여자든 남자든 또 1년차든 10년차든 똑같은 교사로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도 좋았다. 이후 일하랴 공부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 살인적인 업무 강도에 수차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때 그냥 교사로 남을 걸 하는 생각을 할 법도 하지만 조의주 상무의 생각은 다르다. 라이나생명에서 일할 당시 사내 컴퓨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그녀는 자질구레한 서류 정리나 문서 작성을 맡아야 했다. 멋진 상품을 내놓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적잖은 회의를 느꼈다. 하지만 이때 보험계리사 시험을 준비하는 것으로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부사장까지는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푸르덴셜생명 입사 당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냐고 묻는 면접관에게 조의주 상무가 한 답변이다. 2002년 말, 서른아홉의 나이에 그녀는 ‘별(임원)’을 달았다. 그녀는 자신을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전문직종을 선택했고, 여러 분야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멈추지 않고 자기계발에 힘을 썼던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된 힘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흥미를 가지고 있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일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조건도 달라진다.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 되어라 : 조의주 상무는 살아가면서 지향해야 할 것으로 지적인 발전과 물질적 풍요, 사람들과의 유대, 그리고 삶의 끝에서 뒤돌아봤을 때 가치있게 살았다고 생각할 정도의 영적 풍요 등 네 가지를 꼽았다. 지적인 발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연마해야 얻을 수 있고, 물질적 풍요는 지적인 영역을 채우면 어느 정도 따라오는 부분이다. 간혹 사회적인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 중 가정에 소홀하거나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정치적인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은 반쪽 성공에 불과하다. 또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 도움을 받았다고 기억해주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위쪽보다 아래쪽으로 더 많은 사람을 두게 되면서 일만큼이나 사람됨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조의주 상무는 편하고 유연한 상사로 통한다. 상품개발 과정에서 타 부서와 이견이 생기더라도 고집을 내세우기보다는 상대편의 의견을 먼저 들어주고 감정보다는 논리로 일을 처리한다. 고객 중심의 맞춤형 상품이 나온 것은 결국 사람들의 차이를 인정하는 유연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내든 업계든 아니면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이든 여러 사람을 두루 접하고 장점을 찾아내 닮으려고 하다보면 업무 역량이나 품성적인 측면 모두를 종합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조의주 상무의 후배 사랑법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커리어를 잘 관리하고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선배들에게는 항상 능력 있는 직원,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후배이고 싶다. 하지만 후배들로부터는 삶을 채워가는 모습이 아름다운 선배, 그래서 닮고 싶은 선배가 되고 싶다. 
 
성공은 함께 나눌수록 더 커진다. 
 
“팩티브 신약개발의 연구실 일벌레 - 추연성 LG생명과학 상무”
 
신약개발의 꿈을 가진 연구실의 일벌레 : 1992년 박사 학위를 따고 추연성 상무가 욕심을 냈던 곳은 미국 FDA였다.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 세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하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FDA의 관문을 통과하기는 했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입사가 여의치 않아 아벤티스 입사를 결정해야 했다. 그가 일벌레로 찍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번은 크리스마스 연휴에 출근한 그를 회사 로비에서 경비원이 가로막았다. 일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는 추연성 상무가 크리스마스라고 가족과 함께 보낼 리 없다고 짐작한 상사가 그를 들여보내지 말라고 미리 경비원에게 당부했던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불리하다며 말렸던 임상 분야에서 그가 실력을 인정받자 많은 기회들이 찾아왔다. 신약허가 신청서를 작성하는 임무가 그에게 주어진 것은 굉장한 기회였다. 
 
신약허가 신청서는 후보물질 탐색부터 몇 년에 걸쳐 진행된 전임상과 임상단계의 연구 과정과 결과를 집대성하고, 모든 데이터를 분석한 프로젝트의 결정판이다. 분량이 10만 쪽에 달하는 신청서는 말하자면 신약승인 여부가 달려 있는 최종 관문인 셈이다. 고도의 논리력과 분석력을 요구하는 신청서를 그는 멋들어지게 완성했고, 결과물에 대한 찬사도 이어졌다. 아벤티스는 그가 작성한 신약허가 신청서를 사내 양식으로 채택했고, FDA에서도 그의 보고서는 유명세를 탔다. 
 
세계 시장을 향한 첫발을 내딛다 : 추연성 상무가 LG생명과학에 합류한 1996년 초까지도 한국은 신약개발의 불모지였다. 그의 귀국은 그저 사람들의 열정에 반해 내린 결정이었다. 화합물 ‘20304’가 세계적인 신약 ‘팩티브(호흡기질환 치료 항생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1년 동안의 자체적인 임상실험을 마치고 나서였다. 당시 국내 최초로 FDA 승인을 쥘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강하게 들었다. 해외업체와 제휴를 체결하고 공동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개발팀의 판단에 경영진이 이의를 제기했다. 힘겹게 찾아낸 후보물질을 외국 회사에 넘겨야 한다는 데 대한 반감이 컸다. 추연성 상무는 여러 가지를 따져보았지만 공동개발이 최선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항생제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로널드 존슨 박사는 ‘20304’의 효능이 지금까지의 퀴놀론계 항생제 가운데 최고라고 극찬했고, 스미스클라인비첨과 1997년 5월에 제휴를 체결했다. 그러나 1999년 12월, 승인 신청을 내고 1년을 기다려 FDA로부터 받은 결과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경영진은 벼랑 끝에 선 개발팀을 한 번 더 믿어주었다. 글락소스미스클라인(스미스클라인비첨)과의 공동개발이 무산되고 당시 추연성 상무가 주목한 제약사는 진소프트였다. 그리고 한국 제약사상 100여 년 만에 세계적인 신약이 탄생할 것인지는 다시 운명에 맡겨야 했다. 마침내 2003년 4월 5일, FDA는 승인허가서를 보내왔다. 
 
성공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 추연성 상무는 이미 성장호르몬과 B형간염 치료제를 FDA 허가를 목표로 개발중이다. 이 밖에도 10여 개의 신약을 포함해 총 30개 가량의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신약개발의 꿈을 이루어낸 그의 다음 목표는 외국 기업의 도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힘으로 해내는 것이다. 국내 최초로 세계적인 신약을 만들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전문가이지만 추연성 상무는 핵심인재라는 수식어에 손을 내젓는다. 성공은 완성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끝에 가서야 평가할 수 있다는 그가, 지금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았듯 앞으로도 뜨거운 열정으로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Part 3 Think 그리고 남은 이야기 - 일과 성공보다 더 소중한 것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일수록 칭찬합니다 - 정영도 프레지던트호텔 이사
 
필자가 빈틈이 많아 보여서일까. 그는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하우를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어떤 경우에도 먼저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잘못을 한 사람에게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나 곱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물론 제3자에게 그런 속마음을 비쳐서도 안 된다. 누군가를 험담하면 반드시 그만큼 자신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온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오히려 칭찬해주는 것이 서로 편하다는 것이다. 정영도 이사의 다음 인생 계획은 조리업계의 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다. 50대 중반에 요리 명장과 조리사 출신의 임원이면 현재의 위치에서 만족하고 안주할 만도 한데, 다시 새로운 도전을 계획하는 그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의 영광은 곧 가족의 영광이죠 - 이성규 국민은행 부행장
 
이성규 부행장을 만나는 시간에 감동이 스미는 것은 그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면에 섬세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강하지만 따뜻한 리더다. 그의 섬세함은 밖에서나 집안에서나 한결같다. 이만한 지명도를 얻었지만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가정에서는 낙제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스스로 정당화해버리는 출세지향적 인사들과는 다르다. 미국의 경영컨설턴트인 짐 콜린스는 “인생의 궁극적인 성공이란 배우자가 해가 갈수록 당신을 더 좋아하고 존경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삶을 가치있게 살려면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우자와 함께 건강한 노후를 함께 할 수 있도록 챙기는 것도 빼놓지 말아야죠. …… 사회적인 지위를 얻어 아내에게 그만한 영광을 돌려주는 것도 마땅한 의무죠.” 굳이 100조 원의 부실채권을 처리한 구조조정 전문가라는 평가가 없더라도 성공적인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신파도 코믹도 재미있게 즐겨요 - 정영석 넥슨 개발실장
 
언뜻 보기에 질서가 없어 보이지만 매우 질서 정연하다. 계획이 없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알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정영석 실장 스스로 만드는 질서와 계획은 세상이 정해준 일방적인 원칙과 틀을 거부한다. 스스로의 잣대로 중심을 잡는 강인함도 지니고 있다. 그는 조직관리에 무척이나 엄격하지만 한편으로는 장난기도 많다. 장난기는 작품 속에도 숨어 있다. 그가 즐겁게 사는 방법은 일에 끌려가지 않고 일을 주도하는 것, 그리고 즐길 수 있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맘껏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나 뮤지컬, 콘서트를 감상하는 것은 물론 스노우보드, 인라인스케이트, 사진까지 재주가 다양하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렵니다 - 이주식 SK텔레콤 상무
 
그는 지금도 책가방을 들고 다닌다. 박사 과정까지 마친 것이 10년 넘게 지났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보다 더 앞서 통신세상을 열기까지 숱하게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지만 그는 조촐한 자축파티 한번 갖지 않았다. 그의 ‘미니홈피’에 한 여직원이 인사말을 남겼다. 톰 피터스의『미래를 경영하라』의 마지막 페이지에 소개된, 제임스 딘이 한 말이란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 그에게 꼭 어울리는 글이라는 여직원의 말이 깊이 와 닿는다. 
 
한번 결심한 일은 후회한 적이 없어요 - 조의주 푸르덴셜생명 상무
 
‘국내 1호 여성 계리인’이라는 꼬리표를 단 그녀에게 얼마나 뜨거운, 때로는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을까. 보험업계에 막 입성했을 때의 ‘어, 여자네’하는 호기심과 시간이 흐르면서 생겼을 ‘여자가 과연 일을 잘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까지 가지각색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온화함을 주면서도 자신의 삶에서는 철저하게 주인인 그녀는 외유내강형이다. 2003년 미국 재무분석사 1차 시험에 합격했고, 2004년 2차 시험에 도전해 고배의 잔을 마셨다. 그녀는 살인적인 업무 속에서도 재도전을 결심했다. 조금 늦게 가더라도 하면 안 될 이유가 없다는 자신감이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되, 아니다싶은 일은 깨끗하게 포기하고 연연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녀는 지금까지 포기한 일이 거의 없다. 
 
시간을 잊고 살지만, 웃음은 잃지 않아요 - 추연성 LG생명과학 상무
 
그는 시간을 잊고 산다. 퇴근할 시간인지, 잠잘 시간인지, 쉬어야 할 시간인지 옆에서 누군가가 챙겨주지 않으면 일에 묻혀 시간을 망각해버린다. 그에게 포기란 없다. 대충이라는 말도 없다. 취미로 하는 일조차도 연구하고 공부하며 실력을 쌓는다. 하물며 해야 할 업무라면 혼을 불어넣는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 일이 잘되면 미친 듯이 좋아하고,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심으로 슬퍼하고, 그는 그렇게 일한다. 매사에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치밀함은 필자가 원고를 마무리 한 후에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필자로부터 초고를 받아 든 그는 얼마 후 신문사의 웬만한 데스크 못지 않을 정도로 꼼꼼하게 수정한 원고를 내밀었다. 신약을 개발할 때의 치밀함도 이런 것이었으리라. 작은 일도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고, 함께 했던 사람들은 진실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향기가 그의 웃음에는 흠뻑 배어 있다.
 
* 출처 : 핵심인재의 이력서에는 무엇이 있을까 (황숙혜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