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세봉지

Posted by 야근반장
2009. 1. 12. 18:56 gossip/you touch me!
내가 6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의 일이었어요.
늘 말없이 앉아 있어서 별반 눈에 띄지 않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인물이 훤칠한 것도 아닌 그 아이는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간혹 눈에 띄곤 했지요.

그런 아이가 내 눈에 확~하고 들어온 것은 봄비가 제법 내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우산 없이 집에 가야 했죠.
쏟아지는 비를 다 맞아가며 정류장까지 뛰어가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었어요.
그 때, 그 아이가 우산을 들고 한 친구와 쏜살같이 교무실 앞을 뛰어갔습니다.
'친구 우산을 빌려쓰는 모양이지' 하고 무심히 넘겼는데,
잠시 후, 그 아이는 또 다른 아이와 함께 교무실 앞을 뛰어가는 게 보였어요.
그러더니 세 명, 네 명, 다섯 명, 벌써 스무 명에 가까운 친구들을 자기 우산 하나로 데려다주는 것이 아닙니까?

힘들만도 하련만 아이는 활짝 웃으며 친구에게 우산을 받쳐주며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삼십 분쯤 되었을까요? 마지막 친구까지 데려다 주었는지
아이 혼자 교무실 앞을 걸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우산 한 쪽 살이 망가져 그 아이의 어깨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어요.

"선생님도 우산이 없는데, 네가 데려다주련?"
나도 모르게 왜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아이는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아주 행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이는 내가 잡겠다는 우산 손잡이를 굳이 놓지 않고,
자기 어깨를 다 드러내 가며 내게만 우산을 받쳐주었어요.
"정우지? 김정우. 정우는 참 좋은 사람 같다."

그리고 얼마 후, 첫 학부모 모임 때의 일이었어요.
모임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허름한 옷차림의 부부가 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정우 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는 게 아닙니까?

"6년 동안 학교는 처음 오는 길입니다. 정우 녀석이 하도 성화를 해서...
선생님, 전 인사도 할 줄 모릅니다. 고맙습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선생님, 부끄럽지만 저희들의 작은 정성입니다."

허름한 포장지에 싼 선물을 주고 허둥지둥 사라지는 뒷모습...
원래는 일체 선물을 받지 않지만, 왠지 그럴 수가 없었어요.
텅 빈 교실에 앉아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펼쳤습니다.

글쎄, 포장지 안에 들어있는 선물... 그것은 라면 세 봉지였습니다